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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루소

루소의 <에밀>을 바탕으로 바라본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초

어린이와 어른 사이는 너무 거리가 있어 도무지 양자를 연결 시킬만한 공통점이 없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가장 현명한 학자들도 어린이에 대해 어른이 알아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항상 어린이 속에서 어른을 요구할 뿐. 어른이 되기 전의 어린이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나의 주된 관심사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이를 좀더 주의 깊게 바라보고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에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 또한 어린시절 어른들의 입장에서 교육을 받아왔고, 어린시절 느낀 부자연스러움은 대부분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어린이를 어른처럼 대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몇몇 극성의 부모들은 어린아이에게 인위적인 어른들의 지식을 억지로 주입한다.

 

 루소는 이같은 행동을 어린이의 때 묻지 않는 순수함을 강조하며 어린이를 더 깊게 관찰하고 탐구하여 존중하여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를 단순히 교육적인 지침서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기득권층인 로마 카톨릭 교회를 부정하고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타파한다는 주장으로, 특히 성직자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분노를 사 루소의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고 루소에게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결국 루소는 1762년 스위스로 피신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의 첫 번째 원인은 ‘앙시앵 레짐’이다. 앙시앵 레짐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봉건사회는, 문벌이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를 결정하는 신분제적 성향이 짙게 남아있었고 1% 특권층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은 많은 영토와 면세 특권 그리고 농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프랑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민계층과 농민은 태어나면서 의무적으로 부과된 납세의 의무라는 불합리한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고,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정치참여에도 많은 제약이 따랐다. 두 번째, 원인은 왕실의 재정위기와 삼부회의의 소집이다. 프랑스 혁명의 근원은 앙시앵 레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앙시앵 레짐은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 정체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에 가장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것은 바로 왕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 초래한 재정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 재임기부터 왕실의 곳간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재정악화는, 루이 16세까지 계속되었고는 이러한 빈궁기를 타파하기 위해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침해하고 궁정경비를 삭감하는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완강한 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미국의 독립전쟁 참전하게 되며 더 더욱 불가능 해졌다.  결국 루이 16세는 고등법원의 명령에 따라 3부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3부회는 각 신분별로 약 300명 정도로 구성된 집단에서 해당 집단의 대표가 집단의 의사를 표로 대변하는 형태로 운영되어 왔는데, 결과적으로 특권층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이 특정 사안에 대해 담합을 할 경우, 제 3신분은 의사를 반영할 수 없는 불합리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당시 이러한 불합리성을 타파하기 위해 제 3신분은 대표 선출과정에서부터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방법으로 진정서를 활용했다. 이 때 진정서에는 귀족들의 면세특권 타파와 공평과세 원칙의 도입, 명문화된 헌법 재정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번 더 혁명을 위한 불씨를 키우게 되고 이는 제 3신분의 투표 거부와 ‘테니스코트 선서’를 통한 국민의회 창설을 선포하도록 만든다.

 

 눈여겨볼 점은 당시 사회가 봉건적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제3신분의 대표가 불합리한 투표제도나 정책에 당당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제3신분의 대표들이 3부회의에서 제안한 진정서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3신분의 대표가 귀족과 자신들과 평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잠재적인 의식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 기존의 봉건질서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시민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이나 사건이 있었을 텐데, 이 것이 바로 루소를 비롯한 여럿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투쟁의 결과이다. <에밀>에는 어린이와 어른의 올바른 관계를 명시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린이는 복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권위에 복종하는 학생은 지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아이들은 일방적인 복종에 따르도록 교육하면 안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권위를 당시 프랑스의 왕권으로 비유하면 다소 반 체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이는 시민 대표들이 기득권 층에게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피력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분명 주어는 어린이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권위에 억눌려 제 할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제3신분의 평민, 농민, 약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직설적으로 루소는 아이들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쳐진 것에 복종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면서, 권위에 복종하여 행동하는 어린이는 결코 자율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단정짓는다.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왜 프랑스 국민들이 왕에게 왜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또는 시민들 마음속에는 이러한 불합리에 대한 반감이 이미 있었지만, 이를 유식하게 이론적으로 부당함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때 루소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시민들이 하고싶었던 속마음을 속 시원하게 말해주었을 수 있다. 

 

“특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그의 주장을 전개한다. “정념의 근원은 자연이며, 그 근원은 수많은 작은 흐름에 의해서 불어나 큰 강물을 이룬다”라면서 그의 주장은 확고해진다.



루소는 자연질서 만큼은 아이가 순응할 당위를 가진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자유롭게 되기 위해 결국 순응해야 한다라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주장은 루소의 다른 명저인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해답을 제시해 놓았다. 루소가 제시한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각 개인은 전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밖에는 복종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자유로울 수 있는” 쉽게 말해 “각자는 전체에게 자기를 양도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자기를 양도하지 않은 것이 되고, 모든 구성원들은 자기가 양도하는 것과 똑 같은 권리는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받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가 상실한 모든 것도 동등한 가치의 것을 얻고 나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존하기 위한 더 많은 힘을 얻는”일종의 계약이라고 반박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눈앞에 있는 유일한 책은 곧 자연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에밀, 우리는 행복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준 최초의 희망이며, 또 절대로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위 구절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면, 교과과정의 모든 내용이 언제나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보는 점이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루소의 교육과정은 인간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계발될 수 있도록, 발달 과정을 거스르거나 앞지르지 않고 단계적으로 적절하게 조작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동을 신체훈련, 감각훈련, 노작교육을 통해서 정서적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전인적 인간으로 성장시키는데 주안점을 둔다. 루소가 본질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결국 작게는 아이의 행복 넓게는 시민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꾸밈없는 자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복잡한 이데올로기나 종교에서 찾지 않고 순수한 상태의 어린아이와 자연으로 부터 해답을 찾은 것이다. 이 때 자연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푸르른 자연이라 생각하며 다소 허무하고 해결책이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을 문명과 도시에 대비되는 것 이상으로 기존의 인간이 만든 이념과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확대하여 생각해 보면, 당시 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반정부, 반체제적 주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한 인간을 만들기 전에 스스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루소의 저서에는 위의 구절처럼 마리 앙투아네트로 대표되는 유산계급의 사치와 으스대는 허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의 혁명적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루소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기 10년 전에 이미 사망하였고, 따라서 혁명을 위한 어떠한 선전선동의 구절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밀>을 프랑스혁명과 연관 지어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그 자체로 한 아이를 기르는 교육철학적 의미를 지닌 교육서로 바라보는 관점도 많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혁명 정치가인 로베스피에르는 18세기 계몽주의 철학가인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이상을 목표로 한 자코뱅파의 지도자였고, 자신이 루소의 교도임을 자처할 정도로 그를 숭배하였고, 그 뿐만 아니라 프랑스 3부회의 평민(제3신분)의 대표이자 프랑스 혁명의 주역인 콩도르세 또한 루소를 혁명의 선지자이자 그의 사상적 멘토로 삼았다. 고백록에서 에밀을 루소 자신이 “20년의 숙고와 3년 쓰기 작업”의 결실이었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분명 루소의 정치, 교육, 철학적 사상을 압축한 정수다. 그리고 이는 국민주권을 국가에 앞선 것으로 명시한 로베스피에르의 1789년 인권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루소가 프랑스 혁명을 만든 사상적 기초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혹시 이미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고 있었고 그들이 원했던 인물이 루소여서 그가 선택된 것은 아닐까?




참고문헌:

<에밀> - 장자크 루소( JJ Roussea), 정봉구 옮김

 

인터넷 자료: 

 

(위키백과, 프랑스 대혁명), (위키백과, 장자크 루소), (위키백과 로베스피에르),

(정태욱의 원고, 루소와 프랑스 혁명),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7155

http://m.cafe.daum.net/epistle/EByT/8